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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3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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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HCLI 지부 본사.
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사무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나는 창가에 기대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야 좀 실감 나지 않아?"

탁—.

책상 위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케스퍼가 시선을 들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여유로운 듯 빛났다.

나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실감이라…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공식적인 약혼 발표가 났으니까, 이제 사람들은 널 ‘미스 헤크마트이알’이라고 부르겠지?"

케스퍼는 가볍게 웃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내게는 이상하게도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 호칭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천천히 익숙해지면 돼. 어차피 계약한 결혼이잖아."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계약.
우리는 철저히 가문 간의 이해관계로 묶인 사이였다.
헤크마트이알 가문과 우리 가문은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 결혼은 양측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근데 계약이라고만 단정 짓는 건 좀 재미없지 않아?"

케스퍼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는 태연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나는 오래전부터 케스퍼를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의 속내를 완전히 읽을 수 없었다.

"케스퍼, 너 어릴 때랑 많이 변했어."

나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어릴 때?"

"응. 예전에는 나를 그냥 ‘코코의 친구’로만 봤잖아. 가족처럼 대하고, 심지어 코코랑 똑같이 장난쳤고……."

나는 차가 식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넌 나를 여자로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케스퍼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건 당연하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 맞은편, 테이블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어릴 때 넌 그냥 코코랑 장난치는 꼬맹이었잖아."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꼬맹이라니, 너무하——"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나는 갑자기 가까워진 그를 바라봤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깊숙이 나를 담고 있었다.

"이제 널 동생처럼 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내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이건 분명 계약일 뿐이었는데.

그런데도, 왜 그의 말 한마디가 내 귓가에 오래 남는 걸까.

요르문간드 케스퍼 헤크마트이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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