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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6 06:23
사람들이 수많은 매체를 보면서 '동정'은 상대를 시혜적으로 보는 태도고 일종의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을 대하듯 동떨어져서 혀만 차는' 느낌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정은 원래 가장 보편적인 인류애임
일본식의 표현이 넘어와서 동정에 대한 불쾌감 섞인 해석이 많아졌지만 불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도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연민하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불쾌하게 여기는 시각 앞에는 '가벼운'이라는 형용이 붙어서 가벼운 동정이란 식으로 취급될 뿐이지 결코 동정 그 자체가 가벼운 마음인 게 아님

유리는 사랑을 할때 굉장히 어리고 미숙하고 주고받는 마음을 잘 모르는 캐릭터임 둘째누나가 찐사였지만 오랫동안 짝사랑이었고, 그 누나를 내심 연민하며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지만 미숙한 사고와 어린 탓의 낮은 이해력, 나이로 인한 거리감이나 환경이 그걸 불가하게 했고
걔는 묵히는 마음이나 주는 마음밖에 몰라
그런데 선우를 만나고 상처를 확인함으로서 일종의 자신의 마음처럼 그것을 일체화하고 연민하고 보듬어주고 싶어하게 됐다는 게 나는 되게 유의미하게 느껴짐

동정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드는 마음이 아님,, 일례로 지리의 짝사랑 상대를 다시 만나 선우와의 이야기를 들었을 을 때 유리는 그 사람 말에 아무런 공감도, 감정적인 동요도 없었음
있다고 해도 화살표는 지리에게로 쏠려 있을 뿐이고 그 사람 말에는 차단막이라도 내린 것처럼 조금도 내면으로부터 동조하지 않았고
애초에 이것부터가 선우를 가엾이 여기는 것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과 같다
유리 자체가 어디에서나 동정을 느끼는 인물이었다면 캐릭터 성격이 이렇지도 않았을 거고...

유리가 선우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동정'이라고 명명된 이상 유리 또한 선우에게서 받는 동정을 용인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어지는 거임
유리는 둘째누나의 상황을 이해하기 너무 어렸다고 말하고 지금은 그때의 누나가 어땠을지 돌이켜보며 누나를 자주 생각하지만, 그 시간은 지났고 누나는 새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나기 때문에 유리가 누나에게 향한 마음을 동정이라고 칭하기엔 무리가 있다
누나 또한 유리를 지나치게 걱정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유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이에 쌓여 있는 필요 이상의 배려와 신경의 기울임, 조심스러움 같은 게 애초에 그런 식의 내밀한 감정을 차단시킴
유리 또한 지나치게 둘째 누나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면 본인을 먼저 돌보라고 얘기하고
이 모든 게 '그래서 작은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게 그들의 형태인 거임

하지만 유리에게 선우는 그 본인을 그렇게 안쓰럽게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하고 상처를 서로 핥아줘도 괜찮은 사람이고, 그건 또 그들의 구분된 형태인 거지
한참을 어려 어떤 동정도 이해도 불가능했던 짝누와의 때랑은 다르게 이미 유리가 충분히 연민할 수 있는 나이에서 갑자기 맞딱트린 동류의 상처잖아
거부도 해 봤고 거절도 해 봤지만 다정한 성격의 선생님이 그 옆에 동정의 형태로 먼저 있었고, 똑같이 힘든 사람끼리 저마다 아픈 얘기를 하면 갑자기 상대가 똑같이 느끼고 함께 우는 감정을 함께 느끼고
동정이 남의 마음을 자기 것처럼 느끼는 가여운 마음이라면, 애초에 걔네는 맨 처음부터 관계가 동정의 형태였던 거임

보아하니 유리는 사랑의 주고받음 이전에 관계에 있어서도 배타적이고 홀로 동떨어져 있음. 남에게 쉬이 마음을 여는 건 드물 뿐더러 먼저 다가가지도 않는 성격이고, 친구에게도 쉬이 고민을 털어놓지 않음
그렇다고 안쓰럽게 혼자 힘들어하냐 친구와 좀 더 지내 봐 하기에는 본인 성격 자체가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꼬였고 싸가지가 없는 성격임. 그 성격으로 남들과 더 친하게 지내봐라 하기에도 남들이 불쌍함
하지만 어쨌든 유리는 인간이고, 인간의 성장은 결국 건강한 방식의 상호교류와 사랑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한 번 자기 사람이 된 사람에게는 책임감도 있고 정도 있어서 바운더리 안에서는 먼저 내치지 않고 도움 주기도 그다지 인색해하는 성격은 아닌데 걱정을 받거나 도움을 받거나 내면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위로를 받는 데에 있어 이상하게 취약함...
유리 본인은 그런 성격이라고 해도 선우 또한 타고난 성격이 유순하고 선한 것과 대비되게 인간에게 기대가 없고 체념적이며 뚜렷한 선이 있음
그리고 둘 모두 그런 이유가 명확하게 존재하고(동형 캐릭터 조형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거임... 성격의 덩어리가 전부 설득력 있음) 각자 서로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음
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굴곡 속에서, 걔네만이 서로 상처를 핥아주면서 서로를 동정하거나 동정받아도 괜찮은 관계인 거야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많겠지만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사람의 인간성만으로 인연이 이어지거나 하진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유리가 스스로 동정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선우를 또한 동정하는 게 유리의 사랑의 모양이라는 표현이 진짜 와닿았던 것 같다
동정의 형태라는 제목이 유리의 심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함
유리가 반드시 선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유리 본인보다 캐릭터의 조형과 서사, 바깥의 시야에서 훨씬 곱씹을수록 느껴지는 것 같음

사랑하는 마음이 많이 커져도 동정과 연민이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마음에 눌려 사라지거나 치환되는 간단한 개념인 건 사실 아니니까
사랑은 동정을 포함한 가장 거대하고 집약된 감정이고,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을 잘 모른다고 생각함
연인끼리의 사랑은 많이들 알지만, 그 안에 인류애가 들어있는지 아닌지, 동정이나 동경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름
하지만 사실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가장 아끼고 싶은 마음과 크게 구별가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아주 작은 생채기조차 마음이 무너져가며 슬퍼하는 것을 보고 사랑과 구별해서 생각하지는 않잖아

유리에게 사랑의 시작은 동정의 형태고, 그 사랑이 커지고 커질수록 수많은 것들이 뒤섞이며 몸집을 불리겠지만 애초에 걔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마음의 시작이 동정이란 게 나는 역시 좋은 듯... 
오랜만에 쭉 정주행하니까 한 편씩 봤을 때랑은 다르게 느린 것도 못 느끼겠고 재밌다